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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을 사이에 둔 진자운동

이문석 Moon-Seok YI 李文錫

독립기획자 Independent Curator 獨立策展人

 

 

휘휘는 ‘오롯이 오롯이 나의 것이 되는 나의 것’(이후, ‘오롯이 오롯이’)이라는 제목으로 한 번의 전시(2023, 새공간)와 한 번의 공연(2026,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창작스튜디오)을 선보였다. 자신의 동의 없이 작품에 자신과 주고 받은 이메일을 사용하지 말라는 헤어진 애인의 이메일로부터 시작하는 두 작업의 제목은 어처구니 없어서 삼키기 어려웠던 당시의 울분을 묘사하기라도 하려는 듯, ‘오롯이’와 ‘나의 것’을 두 번씩 반복한다. 이 일곱 어절을 발음할 때마다 시옷 받침은 휘휘의 목구멍을 두 번씩 막아선다. 하나의 작업을 선보이기 위해 기어이 두 마디씩 곱씹게 만드는 그이의 작명법은 작가의 전반적인 작업 방향에 드리운다. 그것은 하나의 주제의식을 소화하기 위해 그 주제의식으로부터 도출되는 문제의 봉우리를 두 번 오르락내리락 해야만 하는 고민의 노정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휘휘의 작업 안에서 줄곧 어슴푸레 비치는 두 개의 오름에 대한 글이다.

 

연극 〈오롯이 오롯이〉로 돌아가 보자. 자신의 스튜디오 안에서 두 명의 여성 배우가 약 한 시간가량 정신과 상담사에게 말을 건네거나 혼잣말을 하는 장면으로 이루어진 이 연극은, 자신과의 흔적(이메일)을 사용하려면 동의를 구하라는 메시지를 받은 뒤, 사랑도 일상도 작업도 뭐 하나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 답답함을 시종일관 토로한다. 무대 한켠에는 당시 받았던 이메일을 붙여 두었는데, 그 안에는 “Don’t use my email for your work without my consent.”(내 동의 없이 네 작업에 내 이메일을 사용하지 말아줘.)라는 문장 외에 다른 모든 문장들이 지워져 있다. ‘동의’라는 한 단어로 인해, 휘휘는 전 연인과 서로 섞여 들어갈 수 있었던 영역으로부터, 심지어 기억으로부터도 내쫓긴 듯한 불쾌함에 사로잡힌다. 불쾌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휘휘는 동의라는 단어를 등져야만 한다. 자연스레 작가는 동의가 필요 없는 나만의 것, “오롯이 나의 것이 되는 것”, 즉 자신만의 작업을 찾고자 사진을 뒤적거리지만, 그렇게 해서 발견한 것은 자신의 동의를 초과해버린 존재, 바로 가족의 얼굴이다. 연극에서 ‘삼춘’이라고만 소개되어 있는 가족, ‘경배 삼춘’은 휘휘의 고향인 제주의 한 마을에 들어설지도 모르는 제주 제2공항 건설에 반대하며 투쟁을 한다. 극중에 자신을 “삼춘을 피사체로 써먹는 사진가일 뿐”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휘휘는 삼춘의 얼굴을 촬영할 때, (적극적인 의미의) 동의를 구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혹은 “관찰하고 바라보고, 앞에 있는 것을 찍느라 사라져 버리는” 바를 사진가의 위치가 아닐까 하며 스스로 의심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사진기를 사이에 두고 피사체와 그 너머에 있는 자신과의 관계에서 구한 ‘동의’를 상당히 희석된 것이라고 느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사진은 피사체와의 관계 설정에 앞서, 촬영자가 그 순간을 오롯이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열망에서 감행되는 작업이다.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대상 그 자체, (적어도 ‘멋진’ 사진을 찍을 때까지라도) 지금 모습 그대로 변함 없이 존재하는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행위이며, 사진으로 찍어놓아야 할 만큼 그 피사체를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그 무엇인가(예컨대 남에게는 고통이나 불행이더라도 내게는 흥미로움을 주는 상황)와 공모하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나 휘휘는 촬영을 할 때 모종의 은밀한 접근을 하기에 앞서, 이미 관계를 맺어 둔 피사체들 안에서, 혹은 분리 불가능한 관계 안쪽에서 촬영을 하거나 그러한 소재를 작업에 사용한다. “A에게 고통이나 불행이더라도 B에게 흥미로움을 주는 상황”이라는 문장에서, A와 B는 촬영자 자신으로 수렴되곤 한다. 그래서 동의라는 단어를 뒤로 하고 향한 길의 종착지에서 휘휘는 다시 동의라는 단어를 만난다. 자신의 작업을 들쑤셔 놓는 동의와 피사체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지 못하고 무기력할 뿐인 동의. 사진을 찍는 사람에게 있어서 나만의 자리를 찾으려던 노력은 결국 두 가지 동의의 문제를 오가는 수고로움으로 마무리된다. 나만의 것이라 주장하는 사진 안에는 어떻게든 누군가가 연루되어 있기에,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작품 활동은 결국 누군가와 연루된 자기 자신을 만나는 움직임이 된다. 

피사체로 담기는 가족과 제주의 이야기는 비단 연극에서만 짧게 언급되고 마는 것이 아니다. 제주도 도처에서 벌어지는 개발 반대 시위 현장과 과거 4·3사건 학살 현장의 현재 풍경을 찍어온 휘휘는 연극에서 언급된 ‘경배 삼춘’과의 인터뷰를 하나의 소설처럼 여기며 2020년부터 〈사진소설〉(fotofiction)이란 작업을 선보이고 있다. 이 작업은 역사적 트라우마를 가진 부모 아래서 성장한 한 제주 출신 청년이 제주라는 지역의 굴레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픽션을 사진, 영상, 글 등으로 다양한 매체로 풀어낸다. 〈사진소설〉의 사진과 영상에 등장하는 인물과 풍경은 2011년 이후의 것이다. 이 장면들은 디지털 카메라를 샀다며 자신이 쓰던 필름 카메라를 준 한 동네 오빠 덕분에 생긴 카메라와, 강정마을의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시위 현장에서 주민들이 준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으로 촬영되었다. 필름의 열화(劣化)된 감광층(photoresist layer)은 빛을 제대로 움켜쥐지 못하거나(감도 저하), 불균형하게 빛을 응결시키거나(컬러 시프트), 거칠게 빛을 안착시키는(그레인 증가) 등 세상을 불안정하게 받아들이는데, 이 때문에 길어도 20년이 채 되지 않은 과거가 100년도 더 전에 찍힌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영화의 사당은 암실일지도 모른다』(2025)에 〈사진소설〉의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는 글을 썼다. 이 글에서 작가는 ‘경배 삼춘’이 시위 현장에 들고 나가기 위해 쓴 것으로 보이는 세 문단의 글을 인용하는데, 문단들은 모두 “나는 성산읍 난산리 주민 김경배다.”로 시작한다. 이 단 한 문장은 뒤이어 소개되는 ‘경배 삼춘’에게 닥친 신공항 건설 반대 투쟁 현장에서의 고난과 모욕을 모두 예비한다. 유통기한이 지난 필름과 출신지가 오늘날을 허덕이며 말하는데, 이 사진과 영상과 글 안의 시간은 마치 ‘과거가 기억하는 현재’ 혹은 ‘현재가 예상하는 과거’처럼 뒤틀려 있다. 이처럼 휘휘의 작업 안에서는 엉켜 버린 듯한 두 시간대에 대한 기억술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필름을 위해 출생지를 떠나려 하면서도 다시 필름을 위해 출생지로 돌아오는 작가의 동선에서도 나타난다. 다시 그것은 잊힐 것 같은 기억을 잊힐 것 같은 매체 위에 현상시켜 보지만, 결국 아예 잊히지 않고 오히려 어떻게 등지려 했는지에 대한 궤적이 더 두드러지는 방식으로, 그래서 아카이브가 가진 역설로 드러난다. “아카이브는 영원히 잊힐 수 있는 개별적인 목소리나 사건들을 반드시 구해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사건들의 맥락과, 말하자면 사건들의 망각을 계획했던 규칙은 대부분 아카이브에 저장된다.” 일견 국가 폭력과 개인의 극한 대립을 다루고 있는 것 같은 이 작업 안에는 출생이 인생의 모든 첫마디에 등장해야 하는 휘휘의 난처함과 그로부터 떠나보려는 망각의 길이 기억을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 자신의 출생지로부터 끝없이 탈출하려 하면서도, 바로 그 출생지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끝없이 기억하려 돌아오는, 둘 사이에서 분주하게 오가는 작가의 움직임이 있다.

〈완벽한 크네들리키를 만드는 방법〉(2025, The Sunny Grave)는 휘휘가 체코 유학 시절 벼룩시장에서 발견한 한 필름 틴케이스로부터 시작하는 ‘오디오 비주얼 크리틱’이다. 체코 기업 포마 보헤미아(Foma Bohemia)가 제작한 포마팬(Fomapan) 필름을 담는 용도로 제작된 이 틴케이스를 작가가 구매하려 하자, 판매자는 이 틴케이스 안에 담긴 사진들도 함께 사라고 한다. 처음엔 생면부지의 인물 사진들까지 떠안고 싶지 않았지만, 휘휘는 결국 틴케이스와 함께 사진을 사게 된다. 사진은 가정을 가진 한 남성이 찍은 것이었고,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작은 상자갑 안에 담긴 사진은 촬영한 사람의 손을 떠나 사진작가의 손에 넘겨진다. 〈완벽한 크네들리키를 만드는 방법〉이란 제목은 작가가 체코의 친구들과 함께 본 체코 영화에서 따온 유명한 대사다. 작가는 의도치 않게 자신에게 주어진 이 가족 사진을 통해, 국가 폭력에 저항하는 와중에도 가족간의 유대와 자유에 대한 갈망 등을 간직한 체코와 남한 두 사회의 동질성을 느끼며 그러한 제목을 붙였다고 한다. 휘휘는 영상의 어법을 빌린 비평의 한 형식을 통해, 이 필름 케이스 속 사진이 의도치 않게 필름을 사이에 두고 찍는 이와 찍히는 이, 그리고 바라보는 이들을 모두 동원시키는 일에 대하여 다룬다. 카메라를 쥔 남성도 남성의 카메라가 조준한 사람도, 그 사람들의 기억에 끼어든 휘휘도 모두 필름의 자장 안에서 서로 멀어지지 못하는 상태가 11분 길이의 영상 안에 담긴다. 〈사진소설〉 중간에 나오는 대사, “사진은 단지 시간의 증명일 뿐이다.”(they are just proof that time has existed.)처럼, 사진은 찰나에 대한 증명일 뿐이다. 그러나 바로 이 증명을 통해, 우리는 필름이라는 물성이 가지는 동원력을 감각할 수 있다. 보통 몇백분의 일초의 노출 시간으로 촬영되는 사진의 특성상 어떤 상황의 시간은 표면화되고 주변 사물들은 이를 피할 새 없이 그 표면에 안착된다. 어떤 상황의 시간은 그 깊이를 상실한 채 한없이 납작해질 따름이지만, 바로 그 평면화된 시간 때문에 사진이 ‘촬영된 시간으로부터 사진이 보여지는 시간까지의 깊이’를 더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4차원의 상황 중 촬영자가 “특권화”한 일부만이 3차원으로 출력되면서, 그 과거의 3차원의 면적이 그것을 바라보는 촬영자와 서로 마주하는 네 번째 차원(시간) 동안 발생하는 깊이감이라고 말해볼 수 있다. 이것은 필름의 안팎 사이에서 소격(疏隔)되어 있던 차원(시간)이 창출된 효과다. 그리고 바로 이 네 번째 차원 안으로 필름과 관계를 맺는 여러 존재들, 가족을 촬영하는 남자와 남자가 촬영한 가족과 그들의 사진을 바라보는 휘휘가 연루된다. 존 버거(John Peter Berger, 1926~2017)은 무언가를 연루시키는 사진의 성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 “나는 이것을 보는 행위가 기록으로 남길 만한 가치가 있다고 결정했다라는 말은 이제 이것이 유심히 들여다 볼 가치가 있다는 나의 믿음은, 이미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내가 보여 주지 않기로 한 모든 것들에 비례한다라고 풀어써야 할 수도 있다.”. 휘휘는 사진 한 장 안에 동원되는 것들뿐 아니라, 이 사진이, 필름이 확산되면서 동원되는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한다. 그 과정에서 자신마저 빨려 들어간 상황을 10분 남짓한 영상으로 기록해 둔다. 우리는 이 작업 안에서, 필름이라는 면적이 짧은 찰나의 증명에 불과하면서도 동시에 촬영된 시점과 꺼내본 시점 사이에 발생한 시간적 거리감 안에 마치 끝말잇기처럼 물고 물리는 관계망 전체가 쏟아지듯 등장하는 증명이 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필름의 시간성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가는 두 지점 사이에 서 있다. 

 

연극 〈오롯이 오롯이〉에서 한 배우의 입을 빌려 휘휘는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그런데 사진은, 유독 많은 사람들이 작가가 아닌 일반 사람들도 스스로 자문해요. 사진이란 무엇인가.” 이 물음은 마치 사진에 대한 정의를 구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전 연인의 동의와 삼춘의 동의 사이에 끼어 버리고, 사진을 위해 고향을 떠나고 다시 사진을 위해 고향을 찾는 일을 반복하고, 생면부지의 인물 사진이 만들어낸 관계망에 휘말리는 등, 작가는 필름을 향해 던진 질문에 늘 반대 방향의 답변 사이를 오고가며 곤욕스러워 한다. 다음의 대사는 그러한 어려움의 발로다. “그런 틈에 끼어 있는 것도 너무 지겹고 그 가운데서 사진을 찍고 있던, 것도 지겨워요.” 이렇듯 사진 찍는 일을 자조하는 휘휘는 그럼에도 스스로를 사진가가 아닐까 하며 미심쩍게 정체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휘휘의 이러한 자기 소개는 다소 조심스레 살펴보아야 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작가적 활동, 궤적, 정체성 등을 모두 필름이라는 물성을 경유하면서 보고 있기에, 단지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는 소개는 어딘가 빗나간 답변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오히려 휘휘가 무엇을 찍느냐보다도 필름과 이번에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느냐를 묻는다면, 휘휘는 작가로서의 자기 자신을 필름으로 경유하여 드러내는 사람이라고 정직하게 답변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촬영의 내용보다 촬영에 연결된 자기 자신을 설명하며 필름을 둘러싼 인력과 척력을 드러내는 것을 업으로 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사진은 그 주어진 사건을 활용해 그 기록을 설명한다. 사진은 관찰하는 자의식을 드러내는 과정”이라는 존 버거의 말마따나 휘휘는 필름으로 인한 질문에 스스로를 결박시키면서 자신을 필름 위에 현상시킨다. 그리고 그 결과물에 주저함, 곤욕스러움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자신이 던진 질문에 대한 두 가지 답 사이에서 작가 스스로가 진자운동(振子運動)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2026년, 이문석 (국립현대미술관 고양레지던시 매니저)

  나를 나로 만드신 당신들을 위한, 

  전시 《변해가는, 그러나 변하지 않는》을 위한

 

                                                    양효실(비평)

 

가족/가정. 남녀가 부부가 되고, 아이를 낳아 키워 독립시키고, 늙어가는 문화적 행위. 사회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한 최소 단위. 법적 보호를 받는 커뮤니티 대(對) 급부상하는 선택된 가족(chosen family). 약한 아이들의 낮은 시선에서 드러나는 어른들의 욕망 극장. 완전한 사랑의 환상과 절대적인 결여의 이중주. 양파적 비밀들의 겹. “누가 안 보면 버리고 싶은 것.”(기타노 다케시) “이데올로기적 국가 장치(ISA)” 중 하나. 계속 “수리 중” 푯말이 붙은 장소. 나의 모든 이야기들의 우물. 떠났다고 해서 계속 돌아가고 있는 구멍. 어머니 혹은 엄마. 고등어구이와 된장국. 중산층의 몰락과 그러므로 가족의 해체. 어떻게 네가 내게 그럴 수 있어? 가족사진. 기념일. 휴머니즘. 

 

사진작가 5명이 직접적으로 자신의 가족에 대한 사진을 찍고 그룹전을 한다. 변한다고 하는데 변하지 않는 것 같다고, 가족을 보는 하나의 시점을 제목으로 내보였다. 가족 내 ‘주인공’이 특정되어 피사체로 등장하기도 하고, 불분명한 화면이 제시되기도 한다. 예술이란 취약함을 다루는 장르-매체이고, 자신의 가족에 대한 ‘고백적-1인칭적’ 이야기에서 작가는 더 약하고 더 불안하고 더 구석진 곳에 빛을 쏘임으로써 예술의 사회적 역할, 집단적 가치에 충실할 것이다. 사랑하고 행복하고 충만한 가족사진, 각자 자신의 역할에 맞는 ‘옷’을 입고 걸맞는 자리에 있는 사진은 사진 작가의 사진일 필요가 없다. 사진 작가의 역할, 위상은 누구나의 매체인 SNS 이후 더 협소해지고 더 강력해졌다. 우리는 관객이 자신을 알아보는 사진을 어떻게 찍는지, 어떻게 보여주어야 할 것인지 안다. 작가의 사진이므로 우리는 그런 ‘스투디움’, 정보, 클리셰, 개념, 기능, 반복의 사진은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배우려고, 내 기대와 만족을 내려놓으려고 작가의 사진을 읽을 시간, 기회를 환대한다. 가족 극장에서라면 누구나 따르는 대본, 공감-동일시에 기반한 이야기들을 이들 5명의 작가는 가급적 간과하려고 한다. 가족이라는 주제, 가족이라는 환상 속에서 이들은 잘 안 보이는 것을 포착하려고 하거나, 안 보이는 것들에게 과도한 애정을 주지 “않음으로써” 그것들의 ‘보조적’ 역할을 존중하려고 한다. 가족을 찍은 사진은 고백적이면서 집단적이면서 나아가 정치적이기까지 하다. 그 사진은 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고, 문화적 공통성이나 아비투스의 증거물이고, 권력의 역학관계를 은연중에 드러내며 가족 내 불평등에 대한 목격-고발의 여지를 갖는다. 가족 사진은 작가가 잘 아는 대상, 사랑하는 대상, 그러므로 동시에 혐오하는 대상에 대한 작가 자신의 정동을 담지하기에, 이런 주관적인 관계를 목격하는 전시장 경험은 다소간 엿보기, 관음의 가능성을 보유한다. 동시에 사진 속 대상들은 우리가 공유하는 문화적-집단적 ‘이름’이라는 점에서, 이들 사진은 동시에 사회학적이거나 민속지학적 가치 역시 보유할 것이다. 나는 남의 주관적 경험을 몰래 엿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경험, 자신의 사랑의 대상을 어떻게 사진이라는 장르-장치 안으로 초대해서, 그 대상에 걸맞는 ‘(사진적)분장(masquerade)’을 선물했는지를 볼 것이다. 관계 속에서 산다는 것은 결국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 환상을 일으키고, 희망을 고수하고, 상실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상처와 회복, 사랑과 환멸, 기대와 좌절, 이별과 귀향, 듣기와 상상하기와 같은 서로에게 언제나 의지하고 있을 정동적 움직임이 우리를 좀 더 인간적인, 좀 더 취약한, 좀 더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고 있을 것임은 당연한 것이고. 근래들어 법적-생물학적 가족의 대안으로 여기저기서 보게 되는 선택된 가족은 이번 가족 사진에는 없다. 이번에는 우리가 아는 가족을 놓고 우리가 잘 모르는 이상한 감정, 어긋남, 사랑, 연민, 상실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것이다. 

 

★ 강릉에서 태어나 결혼을 하고 상봉동에 정착하기까지 23번 이사를 다녔다고 했다. 한 나라에서 수십 번 이주한 불안정성을 놓고는 나도 최요한 작가와 수위를 다툴 수 있을 것 같은데, 작가에게 정착으로서의 결혼이 갖는 ‘상징적’ 의미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2020년에 결혼을 하고 2023년에는 최그린을 딸로서 만났으니 사랑하는 여자가 둘이나 생긴 셈이다. 이번 연작 <희망과 절망에 기대어 걷는 밤>은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 주는 아내와 가족을 꾸리고, 세상에서 제일 예쁜 손님으로 오신 딸을 키우는 기쁨과 동시에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회복하는 아내의 과정을 목격한 요한의 일상이 A4 사이즈를 위시한 다양한 크기의 사진으로 구성되었다. 직장에 나간 아내를 대신해서 가사 노동을 하고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그린을 돌보는 지금의 조건/여건상 당분간은 이전처럼 ‘멀리’ 이동해서 사회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중요한 사진은 찍지 못할 것이다. 모든 시간의 돌봄을 요구하는 유아의 보호자-양육자가 됨으로써 요한은 가까움-친밀함에 ‘갇힌’ 것이고, 작업은 아이가 잠든 밤 몇 시간의 동네 외출의 사진적 증거물로 제한될 것이다. 병원에서 아내의 뇌-초음파 영상이나 산더미 같은 약봉지를 찍거나 나와 분리불가능한 딸아이를 초근접의 방식으로 찍거나 상봉동 밤 풍경을 즉물적 사실로 기록한 요한의 사진은 모두 불친절하고, 이야기가 빠져 있고, 부분적이다. 일상에 대한 것임에도 일상의 맥락을 지우는 방식으로 가까이 끌어당김으로써 편재한 브이로그의 클리셰를 지우거나, 가까움을 익숙함에서 떼어내고 정동적 사태로서의 일상성을 보유하려고 한다. 요한이 겪는 희망과 절망의 일상적 반복은 추적-확인불가능한 파편으로 제시되어 있고 크롭된 사진은 요한의 유일무이한 경험과 우리의 공유된 서사 사이를 표류한다. 상봉동 밤 풍경은 여기 봉천동 풍경과 교환가능한 진부함이나 밀도를 갖고, 아빠가 찍은 어린 딸의 사진은 자칫 관음적 대상으로서의 아이들 사진으로 흡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관리하고 통제하는 장소가 아닌 자신이 접속하고 휘말려 있는 감각의 정동, 연루된 자의 끈적거림이 요한의 사진을 주관화한다. 동네는 여행지가 아니고 동네는 문제적 장소가 아니고, 동네는 가족처럼 내가 휘말려 들어간, 연루된, 거리를 취하기 어려운 ‘배치’(들뢰즈)이다. 물론 내가 제일 좋아한 사진은 어린 딸을 목마태운 어느 아버지를 뒤에서 찍은 사진이다. 알아볼만한 배경이나 윤곽을 거의 지운, 장소로부터도 사라지고 있는 것 같은, 거의 음화로 돌아간 것 같은 사진이다. 가족이라는 진부함에 대한 막 가장이 된 작가의 거리두기-수정하기-감각하기이다.           

 

★ 주용성 작가의 연작 <주재환님>은 작가의 아버지 주재환에 대한 것이다. 제목을 듣자마자 담박에 어떤 느낌이 엄습했는데, 누군가의 이름 뒤에 씨가 아니라 ‘님’을 붙이거나 그렇게 부르는 문화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가령 온라인 동호회에서는 멤버들의 이름에 님을 붙여 부름으로써, 멤버들 사이의 그 모든 차이를 중화한다. 님으로 불리는 순간 나이, 성별, 계급과 같은 현실에 엄존하는 불평등, 위계가 무화되고, 오직 같은 취향, 같은 문화를 향유하는 평등한 관계가 출현한다. 그런 점에서 아들 용성이 아버지 재환을 동호회 멤버처럼 호명하는 연작이라면 프로이트 등등이 성역화한/고발한 해묵은 부자관계나 가부장제적 클리셰는 연작에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좋다! 그는 왜 그를 존경심이나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같은 문화, 취미를 공유하는 님으로, 언제든 흩어지고 사라지는 공동체의 멤버로 호명할 수 있게 된 것인가? 왜 그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가? 용성의 사진은 그러므로 부자관계를 이미 벗어나 있고 아버지 재환의 모든 이데올로기적 권력을 해체한 상태이다. 사진은 “본인이 제일 중요했던”, 자신의 이기심, 취미, 욕망에 충실하게 살았던 58년 개띠 주재환님의 삶, 역사에 대한 비교적 중립적이고 방관자적인 이야기를 전달한다. 용성이 3인칭 화자의 관점에서 개괄한 재환의 삶은 댄디-한량-몽상가-선대에 쌓은 것을 다 말아먹은 놈팽이-예술가까지는 도착하지 못한 딜레탕트의 그것이다. 자수성가한 선친의 반대로 예술을 하지 못한 남자 재환은 가령 여행 비용을 마련하려고 선산을 파는 남자이고, 걸리적거리는 것은 무엇이건 자르고 뛰어넘으며 직진하며 “욕망과 타협하지 않은”(라캉) 반-영웅적, 이기적 인간이다. 용성에게 재환은 흥미로운 피사체-인물 유형이고, 가부장제 가족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잉여, 잔여이다. 철들지 않은, 무책임한, 비-가장이었던 재환이 어린 용성을 위시한 가족들을 찍고 편집한 무려 2시간에 달하는 홈무비 영상 <생활의 편린>이 이번 전시에 등장한다. 용성의 현재의 재현 사진 연작과 재현의 과거 용성 등을 찍은 영상의 공동 출현은 이 둘이 같은 커뮤니티에 소속된 동호회 사람들임을 시사한다. 용성이 재환을 친구로 환대하는 것이다.   

 

★ 하다원의 <시차의 집에서 눈을 뜨면>은 대구 달성에 거주하는 외할머니 전금희를 ‘위한’ 것이다. 직전에 다원은 2017년부터 진주에 계신 구순의 친할머니를 방문해 할머니의 일상, 풍경, 집을 찍었고 독립출판물 형식의 사진집 《맞닿은 시간, 2025》을 출간했다. 아버지의 엄마, 혹은 나의 친할머니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면서, ‘서발턴’ 여성의 일상, 딱히 부각시킬 게 없는, 무미건조하게 시골 할머니인 여자, 일생 남의 집에서 안 보이는 사람, 희생과 봉사 혹은 노동이 전부인 삶을 산 여성의 환경, 물건들, 일상을 기록했다. 이것이 계속 ‘손녀’의 작업이라는 게 내게 중요하다. 나는 손녀와 할머니의 유대가 재현-구성되는 방식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가령 딸은 엄마를 재현-구성하면서 교차하는 애증, 분리불가능한 뒤얽힘을 재-경험하지만, 손녀는 할머니에 대해서는 비교적 고른 감정―연민이나 그리움, 유대―을 갖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관계에서 엄마보다 쉽고, 엄마보다 따듯하고 가깝다. 할머니의 이야기에 대해 우리는 덜 복잡하게, 여전히 아이의 자리에서 반응하고 전달할 수 있다. 할머니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겪는 어려움에서 숨을 수 있는 가족의 일부이다.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면서 훈육하는/고통을 주는 양가적 존재이고 할머니는 맛있는 것을 숨겨두었다가 먹이는 존재이다. 이번에 다원이 연민과 그리움으로 품은 외할머니 전금희는 지금까지 계속 살고 있는 시댁에서 사고로 눈에 상처가 났지만 방치했고(아마도 밥 차리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일하다가) 지금껏 사시(斜視)로 살아온 슬픈 역사가 있다. 2021년 즈음에 그 이야기를 들은 다원이 느낀 연민은 가족주의에서 방치된 자리, 삶에 공감이었고, 그래서 처음 들은 이야기에 비논리적인 책임감을 느낀 다원이 ‘한’ 일이 할머니의 시선으로 할머니의 삶을 다시-보기였다. 외할머니는 왼쪽 눈으로는 아주 가까운 것들만 볼 수 있고 오른쪽 눈은 백내장을 앓는다. 다원은 자신의 카메라를 할머니의 눈의 구조에 맞추고, 할머니처럼 보면서, 타자-되기를 수행한다. 할머니는 이 집의 일부이고 이 집은 할머니의 몸의 확장이고 할머니의 사물들은 할머니처럼 시시하고 낡고 늙었다. 할머니는 아스라하게 사라지고 있고, 그 사라짐을 할머니의 눈에 포착되고 포착되지 않은 것들이 먼저 리허설할 것이다. 외관을 갖는 것들은 초점이 사라진 채로 거기 있고 심도를 갖고 끌어당겨진 것들, 왼쪽 눈으로 본 것들은 한 여성의 삶의 디테일들이어서 보기 죄스럽거나 보기에 밋밋한 것들이다. 그리고 가까운 이 두 할머니에 대한 연작이 향하고 있는 것은, 작가의 어머니에 대한 미래의 작업인 것 같은데, 순서상으로 이런 말걸기-다가감이 자연스러워 보인다. 여성 작가가 자신을 둘러싼 가까운 여성들에게 말걸기를 하는 것이.

 

★ 제주에서 나고 자라 4.3부터 강정 해군기지 건설, 제2공항 건설과 같은 제주가 겪었고 지금 당면한 역사적·환경적·생태적 문제를 근거리에서 다루고 있는 휘휘가 이번에 출품한 연작<기억의 집>은 ‘이번’에 “본토” 집을 방문했을 때 아버지가 지금껏 혼자 간직한 사진 몇 장,  교복 입은 여고생인 엄마의 사진처럼 처음 보는 사진들과 이미 가족 사진첩에 있던 사진을 소재로 한다. 휘휘의 부모님은 조부모가 살았던 그 집, 4.3 학살터 비석이 바로 옆에 있는 집에 살며 귤농사를 짓고 있다. 사적인 삶과 공적인 트라우마가 공존하는 마을에 살면서 스무살이 되고서야 제주의 감춰진-재현불가능한 비극을 알게 된 딸이 가족사진을 통해, 혹은 일상적 기록을 통해 공적 역사에 개입해야 하는 셈이다. 제주 제2공항이 들어서려 한 동네에서 살고 있는 삼촌이 43일을 단식한 것은 그가 투사-혁명가여서가 아니라 내내 살아온 동네, 마을, 풍경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평범한 욕망 때문이다. 휘휘의 제주 가족사진도 그렇게 할아버지와 조카와 부모와 동생이 등장하는 ‘가족’ 사진에 밀물처럼 들어와 있는 집단적-공적 기억을 은근슬쩍 건드린다. 가령 오래전 찍은 사진에 붙여진 제목 “밭에 구럼비 심은 아빠”는 육지인인 내가 신문기사로 읽고 기억하는 “강정마을 해안 구럼비 바위”와 같은 문장와 연접하면서 어떤 으스스함을 일으킨다. 뭐지? 밭에 구럼비라니? 구럼비가 상징이 아닌건가? 네이버에 찾아보니 까마귀쪽나무의 제주어인 구럼비는 해안지방에 즐겨심는 가로수, 유명한 방풍식물이었다. 말하자면 제주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나무이고 아빠가 오래 전에 구럼비를 심은 것은 나무 열매가 비싼 값에 팔리는 약재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구럼비는 제주 전체이고, 제주민의 일상적 감각이다. 암시적으로 강정을 내포한 제목에 놀라는 데 휘휘가 조카를 안고 찍은 사진 제목 “강정천”에 아스라해진다. 제주 본토의 선주민들에게 지금 제주에서 일어나는 일이 감각되는 방식과 이곳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통해 제주를 사건화하는 것의 차이 같기도 하다. 정치적 강령이나 구호들을 빼고도 선주민-당사자의 가족으로서 휘휘는 자신의 일상의 느슨함 안으로 공적-집단적 의제를 끌어들일 수 있다. 줄거리만 갖고도 반복할 수 있는 액티비즘을 휘휘는 1인칭 이야기로도 건드릴 수 있다. ‘우리’의 액티비즘은 옳음이 아닌 경험, 삶, 생존을 위한 것임을 그렇게 평범한 사진들과 사진 제목 사이의 긴장을 통해 말할 수 있다. 그게 내가 느낀 으스스함이나 아스라함이다. 덧붙여야 할 것은 아빠가 건넨 사진들을 휘휘가 전유하는 방식이다. “재스캔해서 사이즈를 키우고 다시 사진으로 프린트하는” 공정은 아빠의 사적인 기념물(memorabilia), 유일무이한 원본 사진을 일종의 네거티브로 대우하고 그걸 현재의 자신의 사진으로 전치시키는 공정이다. 아버지 세대의 기억-‘원본’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것과 나란히 자신의 세대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겠다는 휘휘의 결기 같은 것이다. 당사자들의 후세대로써 당사자의 경험을 섣불리 착취하지 않으려는 민감함이다.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으려는, 구호와 선동과 정치와 거리를 두려는 다른 정치의 나타남이다. 

 

★ 용선의 사진은 즉석 사진들이다. 멀리 호주에 사는 형네와 수원에 사는 엄마와 모일 기회가 있으면 용선네는 참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눈다. 형과 엄마가 더 자주 말하는 사람인 현장에서 용선은 즉석 카메라를 들고 곧 사라질 이 모임을 필사한다. 이번에 출품된 《탄생, 비탄생, 탄생》은 죽은 아버지와 엄마의 증언이 유일한 증거인 태어나지 못한 형제들에 대한 것이다. 아버지는 IMF때 사업에 망하고 주폭이 된 집단적 트라우마의 피해자이자 가정 내 폭력의 가해자였다. 아버지는 용선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를 자신의 생년월일로 남기고는 계속 유령으로 용선을 따라다닌다. 엄마는 아버지가 사랑하는 법을 몰랐던 사람이라고 단언하지만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그 시절 우리네 아버지들이 그렇지 않은가? 사적 기억과 상처는 집단적-사회적 일반성을 거치지 않고 가족들 각자에게 각인된 상처와 폭력으로 수렴된다. 자신에게 충분한 사랑을 주었던 아버지와 엄마에게 잦은 폭력을 행사한 아버지라는 두 장면이 용선을 괴롭히거나 엄마와는 다른 자리의 용선에게 아버지를 애도하고 기억할 임무를 강요한다. 잔인한 남편에 대한 복수심에 용선의 형을 낳은 뒤로는 입덧이 시작되면 족족 낙태를 했다는 엄마의 증언은 죽지 않고 살아남은 둘째 용선의 삶의 아슬아슬함이나 죽은 형제들에 대한 용선의 애도를 남긴다. 용선은 강한 엄마, 감히 집 밖으로 도망쳐 살아남은 엄마를 위해, 혹은 그 엄마가 건사하는 가족을 위해 죽은 자들과 자신의 ‘인연’을, 죽은 자들을 기억해야 하는 윤리적 임무를 붙들고 자처한다. 그렇게 형과 자신의 터울을 일(日)로 계산한 1678일에 걸맞는 즉석사진 1678장을 무작위로, 무차별적으로, 이야기나 서사가 없는 순간들의 묶음으로 벽에 건다. 이 많은 날들, 이 많은 사진들 사이 어딘가에서 태어나지 못한 형제들, 비탄생한 타자들이 생겨나고 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와 엄마가 결혼하는 날을 찍은, 자신은 없었던 과거 그날의 영상 <김창호 이미자 결혼식>을 전시장에 배치함으로써, 있었음의 증거로서의 영상이나 이미지와 수리불가능한 상실이나 슬픔에 대한 현재의 감각의 불일치를 보존한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잔인하고 슬픈, 혹은 환대해야할 삶의 진실이다. 삶은 사실 무수한 순간들, 현재들의 불연속적인 나열일 뿐이고, 거기에 얹어지는 행복이나 불행의 서사는 그런 순간들, 현재들을 삭제함으로써 가능해지는 픽션일 뿐이다. 용선은 서사에 사진을 희생시키지 않는 방식으로, 오직 있었음의 무한한 나열로서의 즉석 사진으로 가족의 모임과 만남을 제한함으로써, 가족 이데올로기에 대한 불만족이나 그 이데올로기의 불충분성을 주장하려 한다. 혹은 자신의 상상이나 듣기를 불가능한 쪽으로 최대한 던져서 가족에 대한 환상을 찢거나 겨우 있거나 다행히 있는 가족의 “기적”을 고지하려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결국 예술은 사라진 자들의 목소리를 듣는 ‘미친’ 장치인 셈이겠다. 

■2025년, 양효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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